[봄] 청년기 1964년 ~1984년 (0세 ~ 20세)
다행히 엇나가거나 삐뚤어지지 않았다.
스무 살까지의 청년기를 회상해 보면 생명이 움트는 봄하고는 확연히 멀었던 것 같다. 막막함과 고독이 안으로 침잠했던 시기다. 꿈도 절망도, 낙관도 비관도, 행복도 불행도, 도전도 좌절도 그 어느 것도 아닌 중간 지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모든 게 유보된 상태였다. 어느 소설에 나온 문구인지 기억은 없지만 젊음은 축복이 아닌 형벌과도 같았다.
청년 시절은 배우고 익히는 시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 또래의 동네 친구들은 담배를 배우고, 술을 배우고, 노는 걸 배웠다. 그리고 세 가지 특기(적성)를 살려 일찌감치 동네를 떠났다. 나도 이 세 가지를 배우는 데 좋은(?) 환경이었지만 제대로 못 배웠다. 숫기가 없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덕분(?)이다.
젊은 시절을 회상해 보면 뭐 배운 게 있고 제대로 한 것이 있나 싶지만 고민과 방황도 배우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위로해 본다. 나에게 청년 시절은 엇나가거나 삐뚤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시기였다. 뒤돌아 보니 천만다행이었다.
[여름] 장년기 1985년~2004년 (21세 ~ 40세)
아내와 사랑한 것 빼고 기억하고 싶은 건 없다
여름은 생명이 성장하는 시기이다. 논에 물을 대고, 김을 매고, 뙤약볕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시기다. 누구의 인생이든 여름은 뜨겁고 다이내믹하고 가장 왕성한 시기다. 나도 군대 갔다 오고, 결혼하고, 아이들 키우고, IMF 사태를 맞고, 일을 벌이고 수습하며 한창 일했던 시기다.
당연히 시행착오가 많았다. 주변을 의식하고, 직장 동료와 경쟁하고,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앞서나가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마음은 여유가 없고 생활은 각박했다. 그러나 그땐 몰랐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고 고개를 저을 것 같다. 아내와 사랑한 것 빼고는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장년은 열심히 일하는 시기다. 그러나 열심히 일했음에도 결혼한 해에 IMF 사태가 터졌다. 회사도 나도 위태로웠다. 회사는 천문학적인 자본 잠식 상태였으나 최종현 회장의 결단(자본 출자와 증자)으로 풍전등화 같던 회사가 다시 살아났다. 최○○ 회장은 별로이지만 그의 부친인 최종현 회장은 존경할 만한 분이다.
나 역시 적지 않은 돈을 말아먹었다. 쫄딱 망했다는 표현이 맞다. 우정을 쌓는다고 빚보증 서주고, 재테크 한답시고 주식, 경매에 몰입한 끝에 패가망신했다.
내가 돈을 말아먹은 원인은 남을 믿었고 나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믿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 후 자기 계발에 열을 올렸다. 소소한 성과도 있었지만, 일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많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상관의 안색을 살피고 심기를 헤아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걸 잘해야 출세 가도에 들어설 수 있다. 아부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란 것도 알았다. 그러나 회사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놈은 일 잘하는 놈도, 타고난 놈도 아닌 운 좋은 놈이었다. '놈놈놈' 중에 내가 제일 하수였다.
[가을] 중년기 2005년~2024년 (41세 ~ 60세)
아프니까 중년이다.
가을은 열매를 맺는 결실의 계절이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통하는 시기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이 시기에 가셨다.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아니지만 두 분의 임종을 보고 비로소 내 인생도 꺾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통과 상처를 내기도 하지만 체념을 통한 평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짧은 학력임에도 불구하고 임원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잘 안 풀렸다. 임원이 뭐 별거는 아니지만 멋있어 보였다. 나도 속물이다. 임원은 못 했어도 약간의 재물을 모아 아쉬움을 퉁칠 수 있었다.
몸도 쇠하는 시기다. 여기저기 아프고 결리고 시리다. 병원 응급실에 몇 번 갔다. 두 번 모두 아내와 동행했다. 갔다 와서 깨달은 건 이젠 몸을 막 굴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조심해서 살아야 할 시점이다.
중년은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시기다. 퇴직할 때의 직책과 직급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누군 임원으로 퇴직하면 평생 임원이고 누군 부장으로 퇴직하면 평생 부장으로 대접받는다. 인생 2막을 꺼리는 이유는 직급이 형편없이 강등되기 때문이다. 김 이사, 김 부장에서 하루아침에 김 기사나 김 씨로 추락하는데 마음 편할 리 없다.
중년 막판까지 잘 풀리는 사람은 열에 하나 정도다. 그동안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니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몸과 마음 모두 급격히 상실감을 맛보는 시기다. 그 상실감은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과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청년의 아픔이 엄살이라면 중년의 아픔은 글자 그대로 고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