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나 작가가 들려주는 '인생의 맛 & 영화의 맛' 시리즈는 하나의 영화를 통해 '어떻게 나이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찾아보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요리를 소개해드립니다.
불광동에서 작은 서양 가정식 밥집을 운영하다 보면 손님들의 대화가 가끔 들릴 때가 있다. 그 중 은퇴를 생각할 나이가 다가오고 있는 한 손님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퇴직 후에도 삶은 계속될텐데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앞만 보고 달리던 시간들 지나 은퇴 시기를 앞둔 세대로서 그 말이 왜 그리도 울림이 있던지. 수명 연장에다 건강의 질 역시 어느 때보다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어느덧 노화도, 체력과 총기가 떨어지는 것도 막을 수 없게 됐다.
그런데 바쁘게 살다 보니 나만의 시간을 쓰는 방법에 익숙지 않다.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해도 젊은이들의 소통 방식을 따라갈 수 없어 남은 시간들을 채워갈 일이 혼란을 넘어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질문 하나,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는 정답이 있을까?”
좋아하는 음식, 책, 영화, 운동 등의 다양한 취향들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이 지금은 싫어지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결국 정답이 있다는 강박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의 삶은 좀 더 자유로워지고 흥미로워진다. 노화에 따른 여러 물리적인 제약은 분명 인지 해야 하지만 그냥 다양한 도전을 하다 보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은퇴 후 좋아하는 일(들)을 찾아나가는 방법은 뭘까?
하나의 기분 좋은 방향을 제시하는 영화 <인턴>이 떠오른다.
아내와 사별한지 3 년째 접어든 70세의 벤. 그는 사양산업이 된 종이 전화번호부 회사의 임원까지 역임하다가 은퇴 후 여행을 즐기거나 태극권으로 체력 관리하는 은퇴 생활자다.
하지만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온라인 패션몰의 노인 인턴직에 지원해 채용된다. 이 프로그램이 탐탁지 않았던 젊은 여성 CEO 줄스는 나이 든 인턴 벤의 존재가 성가시기만 하지만 그녀 앞에 닥친 안팎의 문제들로 정신이 없다.
벤은 오랜 직장 생활에서 쌓은 경험과 삶의 지혜로 젊은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줄스가 직면한 회사와 개인적인 위기도 그의 도움으로 극복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나이와 지위를 떠나 인간적인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게다가 그는 새로운 사랑도 회사에서 만난다.
그렇게 벤은 인생의 다음 막을 열린 마음으로 도전했고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나가면서 그 다음이 또 기대되는 삶을 스스로 만들어갔다.
2015년 낸시 마이어스 연출, 로버트 드 니로, 앤 헤서웨이 주연의 <인턴>은 인생의 다음 막을 어떻게 풀어나가면 되는지, 그리고 모든 세대에게 ‘더불어 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희망적이고 따듯한 메시지를 전한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영감을 찾고 있는 예비 은퇴자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필굿(feel good) 영화다.
<인턴>을 보고 떠오른 요리는 아침 식사로 터키인들에게 사랑 받는 터키식 계란 요리 츨브르(Çılbır)이다.
소개할 레시피는 현지화한 약식 버전이다.
유청을 뺀 꾸덕한 질감의 플레인 요구르트에 마늘, 소금을 섞어 넙적하고 편편한 접신에 둥글게 편 다음 그 위에 수란을 올린다. 여기에 버터와 칠리가루로 만든 매콤한 소스를 뿌리면 완성이다. 여기에 식사 빵을 곁들여 먹으면 눈도 입도 즐거운 건강한 식사가 된다.
요구르트의 화사함과 알싸한 마늘의 톡톡 튀는 맛, 흘러내릴 정도로 익힌 계란 노른자의 깊은 고소함, 그리고 매콤하고 전체를 아우르는 붉은 소스의 원숙한 풍미. 각각의 매력을 지닌 재료들을 같이 먹었을 때 하나의 맛있는 조화를 이루는 츨브르는 영화 <인턴>의 인물들과 서사와 닮아 있다.
버터 대신 올리브유, 칠리 가루 대신 고추 가루로 만들 수 있는 한국식 츨브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이 요리, 영화 <인턴>과 함께 즐기며 나의 인생 다음 막은 어떻게 시작하면 될 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 이한나 작가는 누구? 🍴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뉴욕대에서 영화학을 공부했어요.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일을 거치는 가운데 프로듀서로도 활동하며 여러 작품에 참여했어요. 그러다 오랫동안 품어온 요리에 대한 열정을 실행에 옮겨, 지금은 서울에서 푸드 살롱 '스프레드 17'을 운영하며, 요리와 영화가 만나는 흥미로운 콘텐츠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요리 과학서 <풍미의 법칙>을 번역했고, 영화와 요리를 잇는 책도 집필 중입니다.
🌺🍀두 번째 글 엿보기🍀🌺
알 파치노의 탱고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 <여인의 향기>와 독일식 와인음료 '글뤼 바인'의 특별한 만남. 지금 함께 맛보러 떠나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