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은 1643년 영국의 작은 마을 울스도프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를 나와서 그곳에서 교수를 지냈다. 런던에서 활동하던 인생 후반부까지 그가 평생 이동한 곳은 직선거리로 240km 안에 있었다. 그는 활발히 사람을 사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뉴턴의 인생은 조폐국 일을 하기 전인 50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조폐국은 금화, 은화 등의 발행을 책임진 곳이다. 아직 중앙은행이 없던 시대에 통화를 공급하고 통화 가치를 유지하는 일을 했다. 뉴턴은 53살에 조폐국 3대 고위직 중 하나인 감사관, 56살에 최고위직인 조폐국장을 맡게 된다.
당시 금화나 은화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깎아내 팔거나 위조에 활용하는 게 문제였다. 뉴턴은 가장자리를 톱니 모양으로 만들어 이런 행위를 막았다. 또 영국이 금본위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뉴턴의 투자 인생도 50대 이후에 펼쳐진다. 교수 연봉은 100파운드였는데, 조폐국장 때 연봉이 1500파운드로 대우가 확 달라졌다.
뉴턴은 국채, 주식 등에도 투자해 연간 1000파운드의 추가 소득도 올렸다. 당시 영국의 1인당 연소득은 10파운드에 불과했다. 뉴턴은 과학 천재에 그친 게 아니라 고액 연봉과 투자 성과로 상위 1%에 속하는 부자였다.
‘신상’ 금융상품에 투자했던 뉴턴
17세기 영국 귀족과 부자의 투자 대상은 부동산이었다. 귀족들은 상속받은 영지 외에도 런던 같은 도시에 건물을 짓고 임대료를 받는 식의 투자를 했다고 한다. 뉴턴은 1705년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영국 기사 작위를 받아 귀족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뉴턴은 다른 귀족과 달리 부동산보다 ‘신상’인 금융상품에 관심을 뒀다. 그가 조폐국장이던 17세기 후반~18세기 초 영국에선 ‘금융혁명’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된 금융 혁신을 영국식의 시장 중심 금융 시스템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특히 1688년 명예혁명으로 의회 권력이 강해지면서 국왕이 마음대로 세금을 올리지 못하게 되자, 국가 재정을 조달할 새 기법으로 국채 등이 떠올랐고 국채 관리를 위해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 남해(South Sea)회사 등이 생겨났다. 국채와 주식회사는 금융혁명으로 양대 신흥 투자 수단으로 떠올랐다. 이때 뉴턴의 투자 선택은 부동산이 아닌 국채, 주식이었다.
당시 런던 주식 시장에서 3대 대장주는 잉글랜드 은행, 동인도 회사, 남해회사였다. 1694년 설립된 잉글랜드 은행은 영국 국채를 인수하는 대신 발권력을 부여받았다. 뉴턴은 66살이던 1709년부터 잉글랜드 은행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1711년 설립된 남해회사는 영국 정부의 빚을 인수하는 대신 자사 주식을 주는 사업을 했다. 현대적으로 얘기하면 빚을 주식으로 바꿔주는 출자전환을 하는 금융 혁신을 내세운 것이다.
연 6% 배당을 했는데, 재원은 영국 정부에서 나왔다. 전쟁 물자를 대고 돈을 바로 못 받은 업자들은 대신 받은 남해회사 주식을 값이 올랐을 때 팔 수 있었기 때문에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고, 영국 정부는 빚을 꼭 갚을 필요가 없어져 역시 이득이었다.
또 연 4~5%인 국채 이자보다 많은 배당을 주기 위해서 남해회사에 추가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사업권을 줬다. 스페인령 남미 등과의 독점 무역권이다. 그런데 이 추가적인 독점 사업권은 실제로는 거의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입소문만으로 남해회사 주가를 올리려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남해회사는 1720년 역사상 최초의 주식 ‘버블(거품)’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뉴턴은 이미 1714~1717년 남해회사 주식을 사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70대에 접어들었을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