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한혜경 / <남자가 은퇴할 때 후회하는 25가지>저자, 前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인상에 남았던 건 20대 앤디(앤 헤서웨이)가 화려한 뉴욕 패션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앤디가 온갖 실수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업계 최정상으로 군림하는 악마 같은 상사 미란다(메릴 스트립)에게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흥미진진했다.
투쟁적인 노력 끝에 드디어 미란다의 인정을 받게 되지만 미란다의 삶까지 따를 생각은 없었기에 미련 없이 작별을 고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 깊었다. 영화의 전편은 앤디의 성장스토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20년 만에 나온 속편에서는 앤디보다 미란다나 나이젤(스탠리 투치) 같은 시니어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미란다의 변화는 놀라웠다. 여전히 젊은 외모에 편집장이라는 위치도 그대로였지만 이제 그는 과거의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악마’가 아니다. 예전의 무례한 행동이나 독설도 줄어들고, 카리스마는 많이 무뎌졌다. 비서에게 벗어던지던 외투를 직접 옷걸이에 거느라 낑낑대고, 예산을 절감하느라 출장 갈 때도 이코노미 클래스를 탈 정도다.
세월과 함께 미란다가 착해진 걸까? 부드러워진 걸까? 아니다. 그가 이토록 달라진 건 세상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미디어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고, 산업의 구조와 권력구조도 변화했다. 종이매체가 쇠락하고 온라인 클릭 수 전쟁이 시작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미란다는 그룹 회장에게 쩔쩔매고 광고주에게 휘둘리는 수모를 겪으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속편에서 미란다와 앤디는 우여곡절 끝에 특종 인터뷰를 따내고, 외부의 인수합병 리스크를 제거하고, 편집권을 보장받는 등의 활약을 보여준다. 하지만 미란다는 잘 알고 있다. 패션이나 미디어 어느 쪽에서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다는 걸. 소셜미디어와 인플루언서가 이 세계를 주도하고, 자본의 힘에 따라 감원, 해고, 합병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예전의 방식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런웨이’의 주도권을 다시 잡게 되었을 때, 미란다는 앤디에게 말한다.
“우리는 타이타닉 옆에 둔 작은 부목이야.”
편집장에서 물러나면 소홀했던 가족이나 챙겨야 하나, 고민했다는 속마음도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미란다는 일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일이 너무 좋은 걸 어떡해.”
미란다, 변화를 수용하는 현실적인 적응력
함께 영화를 봤던 50대 후배는 미란다가 “일이 너무 좋은 걸 어떡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가장 멋있고 인상 깊었다면서 ‘그래? 난 아닌데?’라는 표정을 짓는 내게 말했다.
“그렇게 평생 좋아할 수 있는 일을 가졌다는 게 정말 부러워요. 그렇게 자기 일을 좋아하니까 그 대단한 성질도 죽이고 카리스마도 포기해가면서 버티는 거잖아요. 그리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도전하는 그런 자세가 멋지지 않나요?”
물론 부럽다. 미란다가 보여주는 이상적인 면모는 ‘일이 너무 좋다’는 순수한 열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카리스마나 고집을 꺾고서라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려는 의지이다. ‘타이타닉 옆의 작은 부목’인 자신의 처지를 냉철하게 인식하면서도 끝까지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시니어가 가져야 할 현역으로서의 치열함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하지만 “일이 너무 좋다.”는 미란다의 고백은 뜨겁고 감동적이지만, 위태롭다고 나는 느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유효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열정을 가졌더라도 시대의 거대한 흐름과 노화라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나이는 좀 먹었지만... 워낙 일을 좋아해서...”라며 무리하게 일을 추진해나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선배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기술은 배우려 하지 않으면서도 주도권은 놓지 않으려 하고, 결과적으로 후배들에게 유무형의 피해만 주는 경우를 볼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든다.
오래 일하는 현역에게 필요한 자세
영화 속의 나이젤은 다르다. 나이젤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도 일의 본질적인 즐거움을 잃지 않는 성숙하고 우아한 현역의 모델이다. 그 역시 패션 산업의 환경이 변하고 예전 같은 화려함이 사라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외부의 권력구조나 환경 변화에 일희일비하는데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자체에 조용히 몰입한다.
나이젤을 보면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일’ 본연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태도야말로 퇴직하거나 나이가 들어도, 오래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는 지독하고 공격적으로 변화하는 패션이나 미디어 업계에서도 가장 오래 살아남을 것 같은 인물이다. 아니 은퇴한 후에도 계속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것처럼 보이는 그런 사람이다.
미란다와 나이젤의 차이는 후배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나이젤은 언제 어디서나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자신의 노화와 한계를 인정하면서 후배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선배들처럼, 바람직한 시니어라면 자신이 선두에 서서 빛나기보다 후배들이 빛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늦은 나이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고 일하기 위해서는 나를 증명하기 위한 ‘투쟁’으로서의 일을 멈추고, 나를 표현하고 타인을 돕는 ‘즐거움’으로서의 일로 옮겨가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사랑하되 집착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