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죽음은 숨이 멎는 순간이 아니라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죽음에 이르는 힘든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때 정보를 정확히 알고 회피하려 들지 않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죽음은 관계에 따라 정의 되죠. 그래서 당사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알츠하이머 환자도 경도의 인지 장애였다가 점점 심해지게 마련이고 증세가 극심하지 않으면 기억이 온전한 시기도 있어요.”
-우리 사회에선 죽음도 평등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삶의 질처럼 죽음도 질이 있습니다. 죽음의 질을 높이려면 죽음을 앞두고서 필요한 서비스를 제때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죠. 그런데 지역에 따라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에 차이가 있어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존중 받으면서 자신답게 죽음을 맞는 문제는 경제적인 능력과는 거의 무관합니다.”
그는 죽음은 당사자와 주변사람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우선 더는 미룰 수 없는 문제에 집중하게 만들죠. 해결하지 못한 관계 문제를 풀게하고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되기도 하죠. 죽음을 앞두고서 가장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찰나의 시간에,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압축적으로 경험하기도 해요.”
-말기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간병은 간병 노동·비용뿐 아니라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역할을 분담할 때도 역할 자체를 나누기보다 환자 곁에 있는 물리적 시간을 서로 나누는 게 좋습니다.그러지 않으면 단적으로 말기인 여성 환자는 장남만 찾는데 간병 노동은 다른 사람 소관이고 정작 장남은 방문객으로 잠깐 면회만 하고 돌아가는 일이 생겨요.”
김 교수는 주 간병자를 따로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경제적 부담을 하는 가족은 간병 노동을 면제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 간병자의 ‘독박간병’ 노동까지 비용으로 계산해 지급하지는 않습니다. 가족 간병은 간병 부담이 두 배 이상입니다. 적어도 다른 가족이 환자 곁에 있을 땐 주 간병자로 하여금 감옥이나 다름없는 간병 현장을 떠나 있게 해야 돼요.”
그는 또 전 사회적으로 돌봄을 기본으로 우리 사회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고령화 시대 이전부터 가정이 병실과 다름없는 상황이 흔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일찍이 의료적 도움과 돌봄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가정을 병실로 생각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삶을 의료화하자는 게 아니라, 삶이 제 자리를 찾고 의료는 일상을 뒷받침하는 보조자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은 삶과 의료의 간극이 너무 크고 의료가 중심이 되면서 삶이 위협받고 있어요.”
그는 말기 환자도 관계의 회복, 일상 회복을 위해서는 집이 병원보다 낫다고 말했다. 집에서 죽음을 맞을 경우 가정 호스피스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집에서 죽음을 맞으면 사망진단을 받는 문제가 가장 큰데 가정 호스피스 등록을 해 놓으면 담당 의사가 임종시 현장에 없었더라도 사망진단을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