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신들린’ 요양보호사였을까, ‘신들의’ 요양보호사로 불려도 괜찮을까?
돌봄에서 이런 성찰은 꼭 필요하다. 단순한 일의 반복과 힘겹고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매너리즘에 빠지면 안 된다. 늘 자신을 검열해야 하고, 안전 사고에 대비하며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자기 성찰은 내가 어떤 자식인지 고민하는 속에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책 속에서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을 뮤즈와 제우스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유가 있다. 누군가의 소중한 엄마, 아빠였고, 삶의 전쟁터에서 혼신을 다해 살았던 그들에게 특별한 명칭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러다 하늘 정원에서 잠시 쉬다 가는 신화 속 존재로 상상해본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뮤즈 님, 제우스 님 하고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쓸 때 그들은 나의 뮤즈로, 제우스로 불렸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익명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구청장, 의사, 교수 같은 좋은 직업을 갖추었으나 한 달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바쁜 자녀를 둔 어르신이 있는가 하면, 일용직 노동자이지만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것을 송구하게 여기며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들을 둔 어르신도 있었다. 그 아들은 요양원의 다른 여덟 분의 어르신들에게까지 아이스크림을 돌리고 창을 노래하며 어머니를 기쁘게 하다 가고 했다. 각자의 사정이 다른 자식들의 입장을 고려하고 싶었다.
‘볍씨가 될 줄 알고 기른 자식이 쭉쟁이인 경우도 있고, 훌륭한 말인 줄 알았던 사람이 별 볼일 없는 말인 경우가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글을 일본의 근대 문학 작가 히구치 이치요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요양원에 계신 뮤즈와 제우스에게는 다양한 자식들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잘나가는 자식이라도 부모를 찾지 않는 자식은 부모 입장에서는 쭉쟁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