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부상과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서 세계 경제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두 개의 블록으로 재편되고 있다. 경제·안보·기술·공급망이 얽힌 이른바 ‘대분열의 시대’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격동하는 미중 패권 전쟁과 대분열의 시대>의 저자이자 캐피털이코노믹스 그룹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닐 시어링은 미·중 블록 재편이 가져올 세계 경제의 변화와 향후 질서를 전망했다.
책에서 탈세계화 대신 ‘분절화(fracturing)’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두 개념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분절화’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세계화가 전면적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역과 투자, 아이디어의 교류는 앞으로도 국경을 넘나들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그 흐름의 방식이다. ‘탈세계화’는 각국이 안으로 돌아서면서 국제 경제 통합이 역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글로벌 경제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재편되고 있다. 공급망은 새롭게 설계되고, 투자 방향은 바뀌며, 전략 산업은 정치적 영향을 더 크게 받고 있다.
세계가 미국과 중국 중심의 블록으로 분절되면서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 제약 분야의 교역이 제한되고 글로벌 공급망도 재편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들 분야의 공급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으로 보는가?
이들 산업의 공통점은 효율성보다 공급망의 회복탄력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각국 정부가 생산 거점을 자국이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국가로 옮기도록 유도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본, 한국도 자국 또는 동맹국의 제조 역량을 키우는데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배제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공급망은 앞으로 더 여러 지역으로 분산될 가능성이 크다.
배터리 분야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은 중국 시장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한편, 중국 밖에서 새로운 원자재 공급처와 생산 거점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핵심 광물은 이러한 지정학적 분절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분야다. 각국 정부는 리튬과 희토류 같은 전략 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국가 안보 차원의 과제로 보고, 대체 공급처에 투자하거나 전략적 협력 관계를 확대하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중국 모두와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분절화 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이 지정학적 갈등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는가?
한국은 중국과는 경제적으로, 미국과는 안보 측면에서 긴밀히 연결돼 있어 특히 어려운 위치에 있다. 현실적인 해법은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하되, 중국과의 경제 관계도 가능한 한 유지하는 ‘선택적 연대’다. 한국 기업은 특정 시장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을 다변화해 양쪽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 반도체·배터리·첨단 제조업의 기술 경쟁력을 잘 활용한다면 한국은 미·중 모두에게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분절화 시대에는 중국 블록을 중심으로 위안화 사용이 늘면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도 강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중국이 달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고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도 유지될 것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위안화는 앞으로 10년 동안 국제적으로, 특히 중국의 영향권 내 무역과 금융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기축통화의 지위는 경제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규모가 크고 유동성이 풍부한 금융시장, 탄탄한 법·제도, 정책의 투명성, 자본이 자유롭게 국경을 오갈 수 있다는 신뢰가 필요하다.
미국은 여전히 이런 강점을 갖고 있다. 투자자들이 미국 금융시장을 신뢰하는 이유는 시장이 크고 개방 돼 있으며 유동성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은 자본 통제를 유지하고 있고 금융 시스템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도 크다. 따라서 통화 체계가 다극화될 가능성은 높지만 달러가 대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달러의 지배력은 일부 약화될 수 있지만 세계의 대표 기축통화 지위를 잃을 가능성은 낮다.
미·중 갈등이 초래할 최악의 시나리오로 대만을 둘러싼 충돌을 꼽았다. 가능성은 낮다고 했지만 중국이 대만을 봉쇄하거나 침공할 경우 세계 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대만을 둘러싼 충돌은 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한 경제 충격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대만은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중심이다.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자동차와 가전제품부터 인공지능, 방위산업까지 광범위한 산업이 영향을 받는다. 파급력은 반도체에만 그치지 않는다.
동아시아 교역로가 차질을 빚고 금융시장은 극심한 변동성을 겪으며 각국 정부는 광범위한 제재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세계 경제는 거의 확실하게 심각한 침체에 빠질 것이다. 충돌이 벌어진다면 그 결과는 엄청나겠지만, 모든 당사자가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실제 발생 가능성은 여전히 비교적 낮다고 본다. |